愤青版:“1882年,朝鲜使臣朴泳孝和金玉均即将出使日本,临行前向清朝政府请求将中国的龙旗作为国旗使用,清朝回复称藩属国不能用五爪龙旗只能用四爪龙旗。其时奉李鸿章之命出使朝鲜的中国使节马建忠(中国近代大语言学家,当时和其兄复旦大学创始人马相伯一起出使朝鲜)建议朝鲜政府采用中国传统的太极八卦旗作为国旗使用,这个建议得到了朝鲜政府的采纳,”
事实真相:1882년(고종 19년) 5월 2 2일에 체결된 조미수호 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당시 조선 정부는 청(淸)이 자기나라 국기인 용기(龍旗) 를 약간 변형하여 사용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즐겨 사용해 오던 태극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 도형기'(太極 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종전의 '태극 도형기'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 태극도형은 일찌기 중국에서 송나라때 주돈이(1012~1073)가 처음으로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일으킨 갑은사지에서 태극도형의 석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앞섰으며 태극도형은 일찍부터 우리민족이 즐겨 사용하였던 신비의 부호였음을 알 수 있다.
1882년 9월 박영효(朴泳孝)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이 국기를 지니고 일본으로 가던 중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을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바로 그 달 25일부터 사용하였다. 고종은 다음해인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태극기는 오늘날과 같이 규격과 도식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국기의 가운데에 태극을 두고 네귀에 건곤감이의 4괘를 배치한 것으로 태극기는 음양의 배치나 괘의 위치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는 그나마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가 1945년 해방 후 태극기를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나 국기의 규격과 도식은 여전히 통일되어 있지 않아 여러가지 종류로 혼용되어 오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비로소 태극기의 도식과 규격이 통일되었다.
정부수립 이듭해인 1949년 1월 4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새로이 수립된 오늘 정부로서는 국기를 제정하여 전국민이 통일되고 정확한 국기를 쓰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같은 해 1월 7일 국무회의는 국기를 제정할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의결하여 이를 문교부에 위촉하였다.
문교부에서는 1949년 1월 14일 국기제정위원회구성준비위원회를 열어 관계부처와 각계에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여 2월 3일 42인을 국기제정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국기제정위원회는 2월 7일 첫모임을 가진 이후 수차례에 걸쳐 협의를 하였고 2월 23일에 열린 국기제정 특별심사위원회에서는 각 위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 검토한 결과 우리국기보양회에서 제안한 도안을 국기로 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후 다시 이에 대한 반론도 있었지만 3월 25일 우리국기보양회의 원안대로 최종 확정 되었다.
위원회에서는 국기봉도 다시 제정키로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써 오던 연꽃봉오리를 버리고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 봉오리를 상징한 것으로 하고 그 색은 금빛으로 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렇게 제정된 태극기는 1949년 10월 15일자 문교부 고시 제2호로서 공포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태극기는 비로서 통일된 규격으로 사용되었다.
*这段文字希望由aaa朋友翻译,以示公正!
*下面也是维基百科(韩文)上的 与中文维基相比,我更相信韩文站点。 丫丫意淫乱舞的汉网资料不仅不客观,只能代表乱扯!
http://ko.wikipedia.org/wiki/%ED%83%9C%EA%B7%B9%EA%B8%B0太极旗由来: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조약의 사후 처리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船上)에서 고안하여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왔다.[1] 국기 문제가 논의된 때는 이보다 앞서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이며, 또한 박영효 이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도 쓰였다. 게다가 이미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로서 “태극 팔괘도”가 규장각에 있었음이 밝혀졌다.[2]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가 아닌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조선책략》에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된다. 고종이 임금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백성을 뜻하는 흰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게 하여 군민일체를 나타내려 하였으나[2]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이후, 1883년 3월 6일 (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조선국기’가 국기로 제정되었다.
http://enjoyjap.egloos.com/102562韩国太极旗及太极图案的由来(韩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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