背景知识,以下是维基资料: 鹿屯島(朝鲜语:녹둔도;俄语:Ноктундо) 图们江上的一座岛屿。位于朝鲜民主主义
人民共和国与俄罗斯滨海边疆区边界。岛屿面积 32平方公里。(约12平方英里)
15世纪,鹿屯岛属于朝鲜王朝。1587年女真人在此地与李舜臣领导的守备军作战。李舜臣被朝鲜族称为
民族英雄。
图们江北部支流多次改道,鹿屯岛有时与滨海边疆区接壤。但该岛一直在朝鲜咸鏡北道先鋒郡(今属罗先特别市)实际控制之下。
1860年俄罗斯帝国逼迫清朝签定中俄
北京条约。清朝将鹿屯岛割让俄罗斯,朝鲜王朝提出鹿屯岛是朝鲜领土,清朝割让无效。其后朝鲜实际控制。到1937年为止居住的都是韩人。1937年俄罗斯强制韩人移往别地。朝鲜于1990年与苏联签定国境条约承认了北京条约。根据2004年东亚日报连载报导“我们的土地,我们的灵魂——到领土纷争的现场去”,鹿屯岛现在还留着明显的农田痕迹,还留着没有主人的房屋、锅、铜碗、缸的碎片。但是两年后,俄罗斯在小岛边沿建起水坝,建设成了军事基地。 韩国一直表示该地是韩国领土。
以下是东亚日报2004年报道,本人翻译: http://news.donga.com/3//20040610/8070989/1 《북한-중국-러시아의 국경이 접하는 러시아 최남단 도시 하산. 낯선 동양인이 역에 내리자 국경수비대원들이 사무실로 연행해 여권을 확인하고 방문목적을 묻는다. “관광”이라고 대답하자 그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별 일도 다 있다는 표정이다.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관광객도 사진 촬영은 안돼요.” 통역을 맡은 고려인 A씨가 거듭 주의를 준다. 마침 하산역을 출발해 두만강 철교(조-러 친선교)를 건너는 열차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일에 두 차례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는 열차라고 한다.》
在俄国最南端,与北韩、
中国接壤的的小镇哈桑,陌生的东方面孔从车站被带进进边检大厅,确认护照和访问目的。一听到“观光”,俄方工作人员把头扭了过来,一幅好像看到了怪人的表情。给我们做向导翻译的高丽人(俄籍朝鲜族)A某也一再嘱咐:“这里有军事设施,游客不能照相。”早上,一列火车映入眼帘,这是从哈桑火车站出发,过俄朝铁桥(俄朝友谊桥)去北韩的列车,每周这样来往2次。
●67년 전에 멈춰선 녹둔도 시계
时间停留在67年前
하산역에서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A씨가 긴장한다. “더 이상 들어가면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녹둔도(鹿屯島)로 들어가는 소로를 가리켰다. 취재기간 중 만난 러시아과학원 태평양지리연구소 세르게이 간지 부소장은 “우리도 두만강 하구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으려면 꼬박 두 달이 걸린다”고 했다.
从哈桑火车站往南走2公里,A某神色紧张了起来:“再往前走就要被俄罗斯边防队员逮捕了。”所以他决定带着我们抄小路去鹿屯岛。采访期间见过面的俄罗斯科学院太平洋
地理研究所的谢尔盖副所长说:“即使我们(俄罗斯的研究人员)去图们江口也要提出申请,整整两个月才能批准。”
녹둔도는 가을엔 무성한 갈대숲이, 여름엔 습지성 식물이 주인노릇을 할 뿐이다. 1937년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이곳에 살던 한인(韓人)들이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면서 이곳은 하루아침에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鹿屯岛秋天的时候芦苇茂密,到了夏天,就是湿地植物的天下了。1937年,前苏联领导人斯大林把这里的朝鲜族居民统统驱赶到了中亚,自此荒无人烟。
녹둔도엔 지금도 망국의 한이 서린 한인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녹둔토성 추정지 부근엔 밭이랑이 뚜렷하고 주인을 잃은 집터와 연자방아가 곳곳에 널려 있다. 가마솥 놋그릇 항아리 파편들도 눈에 띈다. 녹둔도의 시계는 아직도 67년 전에 멈춰 있다.
时至今天,鹿屯岛这块被背井离乡的朝鲜人魂牵梦萦的土地,仍然遍处是当年的痕迹。据推测的鹿屯土城所在地附近,地垄依旧清晰可见,废弃房子的地籍和马厩更是比比皆是。铁锅、铜碗、水缸的碎片吸引眼球。鹿屯岛的时间仍然停留在67年前。
●여의도의 4배가량 되는 녹둔도
比汝矣岛大4倍的鹿屯岛
녹둔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사차마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세조 원년인 1445년.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고지도는 녹둔도를 명기하고 있다. 청(淸)나라와 일제가 만든 지도와 기록도 마찬가지다.
我们能找到的对鹿屯岛最早记录是在世宗实录地理志上,当年叫做沙次麻岛。今天的鹿屯岛得名于世祖元年即1445年,此后的古
地图多使用这个名字,清朝人和日本殖民者做的地图,编写的记录也是如此。
녹둔도의 크기는 고지도마다 다르다. 19세기말 조선에서 편찬된 아국여지도의 녹둔도는 무려 남북 70리, 동서 30리에 이른다. 면적이 300km²가 넘는 셈. 반면 1901년 일제가 펴낸 조선개화사는 녹둔도의 면적을 4km² 정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鹿屯岛的大小,因古地图资料不同而各异。根据19世纪末朝鲜编纂的《俄国舆地图》,鹿屯岛南北跨度大约70里,东西跨度30里,面积超过300平方公里。与之大相径庭,1901年日本人编写的《朝鲜开化史》里,相关介绍显示只有4平方公里。
그러나 연구팀을 이끌고 5차례 녹둔도를 현지 답사한 서울대 이기석 교수는 녹둔도의 면적을 32km²로 정도로 추정했다.
然而,根据前后5次带领我们考察队去鹿屯岛的首尔大学李基锡(音)教授推算,鹿屯岛应该有32平方公里。
●충무공의 자취가 서린 녹둔도
遗留着忠武公(李舜臣)印迹的鹿屯岛
녹둔도는 조선 초 세종의 6진 개척 때 우리 영토로 편입됐다. 세조는 여진족들의 약탈을 우려해 국경수비군에게 엄중 방비하라는 영을 내리기도 한다. 여진족과의 긴장관계는 ‘녹둔도 사건’으로 비화한다.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여진족들이 대거 침입한 것이다.
鹿屯岛在朝鲜王朝初期,世宗开辟6镇的时候成为我国国土。世祖担心女真人南下劫掠,下令重兵把守。和女真人矛盾不断激化,终于发生了鹿屯岛事件。在壬辰倭乱爆发的5年前,也就是1587年,女真人大举南侵。
조선 군사 11명이 살해되고 백성 160여명이 납치된 책임을 지고 충무공 이순신은 조산만호직을 박탈당한다. 조선은 이듬해 반격에 나선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 백의종군해 승리를 이끈 공로로 사면을 받는다.
朝鲜军方面,11名战死,160多人被俘虏。为此李舜臣被追究责任,造山万户职的乌纱帽被撤掉。朝鲜在第二年发动反击,这次李舜臣以一介布衣之身参军获得了胜利,将功折罪。
녹둔도는 그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시기는 청나라와 조선이 접경지역을 무인지대(無人地帶)로 봉금했던 때와 일치한다. 하지만 노계현 전 방송통신대 교수는 “그 시기에도 녹둔도가 조선의 영토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鹿屯岛此后一直到19世纪晚期,都没有人类活动的痕迹。这和满清封禁和朝鲜接壤的
东北也是时间一致的。但是放送通信的卢启铉(音)教授坚持,即使是在那段时间,鹿屯岛也显然是朝鲜领土。
●지형변화로 ‘섬 아닌 섬’이 되다
地形
变化,小岛若隐若现
문제는 두만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한 토사의 퇴적으로 녹둔도 북쪽의 물줄기가 차츰 가늘어져 언제부터인가 녹둔도와 연해주가 이어진 것. 동해의 수위 변화도 두만강 수로 변화의 한 요인이 됐다.
问题是,图们江口经常泛滥,沙土堆积,鹿屯岛北面的水道渐渐变窄,不知不觉就和俄罗斯滨海边疆区一侧连起来了。东海(日本海)水位的变化也是导致图们江河道变化的重要原因。
1709년 청나라 강희제의 지시로 만든 지도에 이미 녹둔도와 연해주는 붙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잇다. 고종 때 제작된 듯한 경흥읍지의 녹둔도도 그렇게 돼 있다. 따라서 15세기 당시 녹둔도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1709年,清朝的康熙皇帝下旨制作的地图显示,鹿屯岛和今天的滨海边疆区一侧已经紧密相连,高宗时期制作的庆兴邑志亦然。所以已经很难辨认15世纪鹿屯岛的位置了。
다만 최근 발견된 녹둔토성 추정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높이 6∼7m, 길이 4km의 토축물은 함경도 조산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에 따라 녹둔도와 연해주를 갈랐을 두만강 지류(일명 녹둔강)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이기석 교수는 “녹둔도 추정지에서 둔전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은 경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但是最近发现的鹿屯土城推定所在地成了重要的线索。这个高6到7米,长4公里的土制建筑距离咸镜道造山地区有4公里。根据这条线索,鹿屯岛和滨海边疆区分隔开的图们江支流(又名鹿屯江)的位置也就能推定出来。李基锡(音)教授说,在鹿屯岛推定地,根据屯田的大小,可以确定边界。
●淸 원세개 “淸-러조약 불합리” 인정
认定清人袁世凯签订的中俄条约不合理
지형변화로 연해주와 붙어버리긴 했지만 녹둔도는 여전히 조선의 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청나라를 압박해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을 체결하면서 녹둔도의 운명이 바뀌었다. 러시아가 슬그머니 녹둔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킨 것이다.
尽管由于地形变化,鹿屯岛和滨海边疆区相连,可是它仍然是朝鲜的领土。1860年沙皇俄国逼迫满清签订北京条约的时候,鹿屯岛的命运发生了改变,俄罗斯把鹿屯岛一并窃取走了。
당시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대응은 미미했다. 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은 “조선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두만강 하구에 국경표석을 세운 의미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当时国际局势不明,朝鲜没有话语权。东亚领土问题研究所长杨太镇(音)指出:”朝鲜并没有参与确认俄国、清国在图们江口的国界标识的确认,完全不知情。“
조선은 뒤늦게 1885년 청나라와 러시아에 3국의 공동 감계안(勘界案)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야심과 청나라의 무성의에 조선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청국관리의 지리적 미숙으로 불합리한 약서를 만들어 조선에 탄식을 끼치게 했다.” 원세개 청나라 공사의 이 말은 조선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后来在1885年,朝鲜满清和沙俄三国的共同勘界案不可接受。俄罗斯的野心和满清的敷衍推赖使朝鲜无能为力。清人不谙当地地理情况,签订了不合理的条约,令人叹息。”清国公使袁世凯的这句话揭示了朝鲜的悲剧。
●그래도 녹둔도는 조선사람 땅
鹿屯岛仍然是朝鲜人的土地
베이징조약 체결 이후에도 녹둔도는 엄연히 조선사람들의 땅이었다. 1883년 어윤중 서북경략사는 “녹둔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北京条约缔结以后,鹿屯岛也是朝鲜人的土地。1883年,西北经略使鱼允中向朝廷上表说:“鹿屯岛上住的全是朝鲜人,其他国家的人一个都没有。”
고종은 또 김광훈과 신선욱을 밀사로 파견해 녹둔도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들은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를 새겨 넣었다.
为了掌握鹿屯岛的情况,高宗再次派遣金光薰和申先郁作为密使考察。他们在俄国舆地图上就记载道,鹿屯岛上有113家口,计822名朝鲜人居住。
20세기에 들어서선 녹둔도는 나라 잃은 한인들의 근거지였다. 독립운동가 신필수가 1921년 옛 녹둔도인 녹동에 머물면서 남긴 일기에는 한인마을이 40가구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세르게이 간지 부소장은 “1930년대까지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에 한인 7만여명이 거주했다”고 말했다.
进入20世纪,鹿屯岛上的韩人就成了弃民。独立运动家申弼秀1921年访问的时候记载道,居留在鹿屯岛韩人村的只剩下40家口。谢尔盖副所长说:“一直到1930年代,包括鹿屯岛,整个沿海州共有7万多韩人居住。”
● 북한이 재확인한 ‘녹둔도 비극’
北韩再次确认的鹿屯岛悲剧
일본 외교문서에는 조선 조정이 줄기차게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 양태진 소장은 “조선이 러시아와 청나라의 국경획정을 수용하지 않았으므로 한-러 간에는 공식적인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日本的外交文书记载了朝鲜朝廷坚决要求返还鹿屯岛的斗争。对应的,杨太镇(音)所长说:“俄罗斯和满清划定的边界对朝鲜不适用,韩国和俄罗斯之间没有正式的国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0년 옛 소련과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조약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북한은 결국 녹둔도가 러시아의 영토임을 공식 인정해준 셈이다.
不顾以上事实,北韩在1990年和原苏联缔结了边境条约,原封原样接受了北京条约。北韩正式承认鹿屯岛是俄国的。
하산=특별취재팀
哈桑特派采访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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